Field Note


'최선을 다하는 지리 선생님(최지선)' 회의 후 답사 활동으로 개최지 남원의 지리를 답사하였다.

주최자 이태우 선생님의 학생들의 수행평가 과제물을 이용해 남원에 대한 내용을 가볍게 파악하고, 그 중 일부를 실제 답사하는 코스.




남원은 추어탕으로 유명하단다. 

흔한 미꾸라지인데 왜 굳이 남원에서 유명한 지를 생각했으나, 미꾸라지를 비롯한 재료의 공급, 또는 남원에서 추어탕 레시피가 탄생했거나, 혹은 어떤 유명한 식당을 중심으로 추어탕거리가 만들어지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해보았다.

마지막 가설(유명한 식당...)의 경우는 쉽게 결론을 내릴 수 있었고 (주도적인 유명한 식당의 부재)

재료의 공급과 레시피의 원조라는 가설이 맞을 듯 하다.

(출처 : 네이버 사전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추어탕거리는 광한루원 주변에 몇 개의 식당이 연달아 존재하는 형태로 존재하는데, 대로의 한 편에만 있어서 추어탕'거리'라는 이름에는 조금 아쉬운 면이 있다.


그래서 그런지 추어탕거리 곳곳에 앞선 사진과 같은 미꾸라지 조형물을 배치하였다. 아래 사진에서도 작게 존재한다.

미꾸라지가 나그네처럼 행색을 하고 있는 것이 눈에 띄는데, 남원에서 상징적인 춘향전의 이 도령을 표현한 것으로 여겨진다.




남원에서 타지 사람에게 가장 유명한 장소라면 역시 이 곳, 광한루가 아닐까.

남원에 두 번째 방문인데 광한루는 두 번 왔으니까, 남원 방문의 목적일 수도 있을 것 같다.


춘향전으로 광한루가 알려진 덕분에, 춘향가묘처럼 춘향전 인기 덕분에 만든 거 아닌가 하는 의심을 했지만 의심으로 끝났다.

광한루는 1419년 광통루라는 이름으로 만들어졌고, 1434년에 광한루로 개칭되었다고 하여, 춘향전이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조선 후기에 비해 훨씬 이르다.

(출처 : 대한민국 구석구석 | 광한루)


춘향전으로 인해 춘향가묘, 즉 소설 주인공인 춘향의 묘가 만들어져 있다. 남원시내에서 구룡폭포 가는 도로변에 있는데 사진으로는 담지 못했다.

여러모로 남원은 춘향의 도시라는 것을 증명한 셈이다.



춘향전에서 춘향이 옥살이를 했던 그 장면 때문인지, 일제 시대 광한루는 감옥으로 이용된 적이 있다고.

감옥으로 이용하려고 나무를 꽂기 위해 광한루의 주춧돌을 훼손한 흔적이 남아있다.



서울과 달리 11월 중순은 아직 가을의 흔적이 남았을 시점이었다.


사람이 적다면 이 공간을 독점한 작품 사진을 남길 수 있는 좋은 구도.

답사 인도자 이태우 선생님의 경우에도 아내와의 작품 사진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그래도 사진에 있어 매우 중요한 부분은 날씨라고 생각한다.



광한루는 그 자체 뿐만 아니라 일종의 공원처럼 꾸며져 있고, 이를 '광한루원'으로 칭한다.


광한루원 밖으로도 가을의 흔적이 아직 많이 남아서 때마침 자전거 타고 지나가시는 부부를 모델 삼아서.




남원은 신라시대 9주 5소경 중 5소경 중 하나였고, 조선시대까지 읍성이 축조되어 있던 곳이다. 

그러나 지금은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읍성의 실제 모습을 찾을 수가 없지만, 서문, 동문, 남문과 같은 지명으로 읍성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북문은 잘 이용되지 않아 

남원 뿐만 아니라 전주, 제주 등에서도 이러한 지명이 남아있어 마찬가지로 읍성이 축조되었고 문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대개 문이 있던 자리는 로터리(회전교차로)로 이용되고 있다.

서울의 사례를 참고할 때, 문을 살려두고 그 주위를 로터리로 만들었다가 문이 사라졌다고 생각할 수 있다.

또는 문과 성벽이 먼저 사라졌지만, 신작로의 주요 도로가 교차하는 지점이므로 로터리를 만들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등등 여러 가지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겠다.


더불어 구 남원역은 남원읍성의 영역 내에 들어와 있는데, 이는 일제가 읍성 파괴를 목적으로 남원역과 전라선 철도를 배치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실제 개량 이전의 철도 노선을 보면 이럴 필요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크게 돌아서 온다.



서문휴게소, 서문이용원 등의 이름에서 서문이라는 지명을 여전히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 자리가 서문이 있었던 곳임을 알 수 있다.


한편 남원에도 읍성이 있었던 또 하나의 흔적으로, 상공에서 봤을 때 남원 시내 중심부의 가로망이 직교형이라는 점을 들 수 있다.

내부도 불규칙한 가로망을 가진 낙안읍성과는 또 다른 경우이기는 하다.


신라시대 경주도 직교형의 가로망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시대의 가로망이 지금까지 전해진 것인지에 대해서는 연구를 많이 해야할 듯 하다.

당시 경주는 큰 그리드로 구성되어 있고 각 그리드 내부가 일정하지 않고 복잡한데, 남원에서도 비슷하다.



서문로터리 한 켠에 서 있던 비석.

이걸 현수막으로 가려버린 것은 매우 마음에 들지 않는다. 과거 흔적을 소홀히 한다는 인상.


옆면에는 "이곳은 남원성의 서문(망다루)가 있던 터이다." 라고 시작하고 있지만, 사진으로는 더 이상 정확하게 판독하기가 어렵다.

자세히 보니 한자가 섞여있고, 글자가 닳아서 판독이 쉽지 않다.




남원 서문로터리에서 남원고등학교 방향으로 가는 길에 남원읍성의 성벽 일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성벽이 여기에서 꺾이는 지점인 걸, 모양을 보고서 추정할 수 있다.



그렇다고 사실 모든 게 윗 사진처럼 돌로 남아있는 것은 아니다.


다음은 문화재 안내표지판에 적힌 내용


통일신라시대에 남원에는 지방 행정중심인 소경이 자리하였으며, 그에 따른 성곽이 있었다. 중국식 읍성을 본 따 네모반듯한 모양으로 규모는 3.4km 가량의 둘레에 높이 4m 정도였으며, 사방에 문을 두었다. 정유재란(1597) 때 이곳에서 조명연합군(조선군 1,000명, 명군 3,000명)과 성안의 주민 6,000여 명이 합세하여 5만 6천여 왜군의 공격을 맞아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성은 함락되었고 만 여명에 달하는 민관군이 장렬히 전사하였다. 전투 중 대부분의 건물이 불타고 민가 몇 채만이 남았다고 하니 당시의 참화를 짐작할 수 있다. 

시련과 좌절을 딛고 선 조상들의 기상을 간직해 온 남원읍성은 동학 혁명과 전라선 철도 개설 등으로 많이 허물어졌는데 최근에 일부를 복원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정유재란 당시 전투에서 희생된 사람들을 한데 모아 묻었는데, 만인의총이라는 이름으로 남아있다.

하지만 원래 만인의총의 원래 위치는 구 남원역 위치에 있었다. 따라서 일제가 이 만인의총을 해체하기 위한 목적으로 남원역을 그 위치에 만든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망가진 만인의총은 1964년에 지금 위치로 옮겨서 새로 조성되었다고 한다.

(관련 : 두산백과 | 만인의총)




그 다음은 남원고를 가로질러 도착한 남원향교.

(사실 이 쪽으로 온 건 아니지만) 향교, 왕릉 앞에 있는 홍살문이 맞이하고 있다.



남원향교의 입구는 오른쪽.

누각이 문보다 앞에 있는 경우도 찾기 쉽지 않을 것 같지만, 약간 독특한 구조로 남은 셈 치면 될 듯 하다.

그 누각 앞에는 하마비도 있다. 말에서 내리라는 의미이다.


남원향교의 위치는 야트막한 산의 아랫부분에 위치하고 있어, 입지 상 배산임수에 해당한다.

실제 큰 홍수가 났을 때도 향교 아랫마을은 잠겨도 향교는 잠기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전설처럼 전해져온다고.

반면 남원읍성은 요천 홍수 시 충분히 수해를 입을 수 있는 위치에 있다.



성균관, 향교에서 실제 강습이 일어나는 공간이 명륜당.

서울 성균관의 경우 명륜당이 뒤에 있는 배치를 하고 있지만, 많은 향교들처럼 남원향교는 명륜당을 가장 전면에 배치하고 있다.




다시 시내로 돌아와 춘향테마파크 옆으로 여차저차 올라가면 만날 수 있는 전망대 카페.

이름을 몰랐는데 집에 와서 검색해보니 원각사 전망대라고 한다.


때마침 인스타그램에 이탈리아 베로나Verona 예쁜 사진이 올라왔었는데, 지리 선생님들끼리는 비슷하다는데 의견을 같이 했다.

하지만 그 밖으로는 차마...... ㅋㅋㅋㅋ


사실 비슷하다고 한 건 경관 상의 특징 때문. 

건축의 미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남원이 베로나에 비할 바가 못 되지만 (확실히 떨어짐)

그다지 높지 않은 건물, 그러면서 단층 건물이 아닌 다층 건물 위주로 시가지를 꽉 채우고 있다는 점에서,

또한 가운데 교회가 있다는 점에서도 유사점이 있다. (물론 그 교회가 도시 중심을 이루는가, 아니면 그냥 장식인가ㅋㅋㅋ의 차이가 있다)


그나저나 답사 전 날에 호남 쪽에 폭우가 내리더니... 답사일에도 안개가 한참...

라이트룸에 디헤이즈 효과는 상당히 놀랍다. 




마지막 코스는 지형학 분야에서 하천쟁탈로 유명한 구룡폭포.

중등 교원임용시험에서도 기출된 곳으로 수많은 전공자들이 들어는 봤을 만한 그 폭포이다.

그리고 구룡폭포보다 조금만 상류로 가면 운봉고원을 만나고, 그 안에는 곡중분수계라는 이름으로 산 / 능선이 아님에도 하천의 분수계가 만들어진 곳이 있다. (이 날 못 찾았음)


하지만 안개에 가리기도 했지만, 실제로 이 곳만 봐서는 하천쟁탈을 관찰할 수는 없다. 



하천쟁탈은 어떤 하천이 다른 하천의 유로를 침범하고 결국 침범한 지점부터 상류의 물줄기를 끌어가는 현상이다.

운봉고원에서 어떻게 하천쟁탈이 일어났는지는 안내표지판의 설명을 참고.


구룡폭포를 흐르는 하천은 하천쟁탈을 일으킨 하천으로, 쟁탈 이후 구룡폭포의 유량은 증가하고 침식은 더 활발해졌을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남원 일대 전체에는 흐리거나 안개가 끼었고, 높은 곳으로 올라갈수록 안개는 짙었다.

남원에서 구룡폭포 갈 때는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어마어마한 안개 속에 있었고, 내려갈 때도 별 차이는 없어도 갈 때보다는 나았다.



답사는 다시 남원으로 내려와 추어탕을 먹으며 마무리했다.

평소에 잘 먹지도 않은 추어탕인데 사진이라도 좀 찍었어야 했는데... 라는 아쉬움을 남겼다.